여자 영업이 술자리에서 겪는 것들 - 10년 경력도 피할 수 없었던 순간들

여자 영업이 술자리에서 겪는 것들 - 10년 경력도 피할 수 없었던 순간들

여자 영업이 술자리에서 겪는 것들 - 10년 경력도 피할 수 없었던 순간들

오늘도 저녁 약속

오늘 7시. K그룹 CISO님이랑 저녁. 제안서 넣고 한 달 지났다. BMT는 다음 주. “차장님, 저녁 한번 하시죠.” 문자 왔다.

거절할 수 없다. 30억짜리 프로젝트다. SE랑 같이 가려고 했다. “혼자 오시죠.” 답장 왔다. 아. 이런 거다.

샤워하고 메이크업 다시 했다. 너무 화려하면 안 된다. 너무 수수해도 안 된다. 재킷 입었다. 남성적인 느낌으로. ‘프로페셔널’하게 보여야 한다.

10년 했는데도 매번 계산한다. 무슨 옷, 어떤 말투, 어느 정도 거리. 남자 영업들은 이런 거 안 해도 되는데.

첫 잔부터 시작되는 것

강남 한정식. 룸으로 안내됐다. CISO님 혼자. 부하 직원 없다. “오셨어요? 편하게 앉으세요.”

자리 배치가 고민이다. 너무 가까이 앉으면 오해하고. 너무 멀리 앉으면 ‘거리감 두냐’고.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적당한 거리.

“바쁘실 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CISO님 이야기 듣고 싶었어요.” 비즈니스 톤. 유지한다.

첫 잔 따라주신다. “제가 따르겠습니다.”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웃으면서 받았다. 첫 잔부터 게임이다. 파워 게임.

받으면 ‘여자답다’는 소리 듣고. 안 받으면 ‘예의 없다’는 소리 듣는다. 그냥 받는다. 미소 짓고.

“차장님은 술 잘 드세요?” 질문 온다. “적당히요. 일하는 데 지장 없을 정도로.” 대답도 계산이다. 너무 잘하면 술친구 되고. 못한다 하면 ‘재미없다’고 한다.

대화 주제의 경계선

“결혼은 안 하셨어요?” 두 잔 마시니까 시작됐다. 개인 질문.

“아직이요. 일이 재밌어서.” 웃으면서 답한다. “일만 하면 나이 가요. 여자는 빨리 해야죠.” 아. 이분 그쪽이구나.

“요즘은 결혼 늦게 해도 괜찮더라고요.” 부드럽게 화제 돌린다. 제안서 얘기로. “다음 주 BMT요, 저희 DLP 성능이…”

“일 얘기는 나중에.” 손 저으신다. “오늘은 편하게 얘기해요.” 편하게의 뜻. 나는 안다. 개인적인 얘기 하자는 뜻.

“집은 어디세요?” “부모님은 뭐 하세요?” “남자친구는?”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질문이 계속 들어온다.

대답해야 한다. 안 하면 ‘차갑다’고 한다. 차갑다는 평가 나오면. 프로젝트 날아간다. 그래서 대답한다. 적당히.

“집은 역삼동이요. 회사 가깝게.” “부모님은 대전이세요.” “남자친구는… 일 때문에 만나기 힘들어서요.” 웃으면서. 계속 웃는다.

왜 남자 영업들은 이런 질문 안 받을까. 팀장님 술자리 가면 골프 얘기만 한다는데. 나는 매번 이런 질문 받는다.

선을 지키는 기술

“차장님 참 예쁘네요.” 세 잔째. “감사합니다.” 짧게 받는다. 더 이상 대답 안 한다. 화제 돌린다.

“다음 주 BMT에서 경쟁사 M사 나온다고 들었는데요.” “M사 가격은 싸지만 기능은 저희가 우위예요.” 비즈니스로 돌린다. 계속.

“일 얘기는 그만하고.” 또 손 젓는다. “차장님, 스트레스 많이 받죠? 영업이 힘들잖아요.” “괜찮아요. 이 일 좋아해서 하고 있어서요.”

“저랑 편하게 지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여기서부터 조심이다. 라인이다.

“감사합니다. CISO님이 많이 도와주시니까 저희 제안서도 잘 쓸 수 있었어요.” 비즈니스 관계. 강조한다. 계속.

손 잡으려고 하신다. 피한다. 자연스럽게. “아, 화장실 좀.” 일어난다. 화장실에서 심호흡. 5분.

거울 본다. 화장 고친다. ‘30억. 30억. 참아라. 프로페셔널하게.’ 스스로 세뇌한다. 돌아간다.

자리 바꿔 앉는다. 더 멀리. “화장실 멀더라고요.” 웃으면서 말한다. 더 이상 가까이 못 오게. 거리 만든다.

이게 기술이다. 10년 배운 거. 노골적으로 싫다 하면 안 된다. 자연스럽게 거리 둔다. 미소 유지하면서.

술자리 끝나고

9시 반. 1차 끝났다. “2차 가실래요?” 질문 온다. “내일 아침 일찍 미팅이 있어서요.” 거절한다.

“한 잔만 더.” 재차 요청. “정말 죄송해요. 다음에 꼭 뵙겠습니다.” 고개 숙인다. 웃으면서.

택시 탔다. 기사님께 “빨리 가주세요.” 10분 지나야 숨 쉰다. 제대로.

핸드폰 봤다. SE한테 문자 왔다. “차장님 어떻게 됐어요? 괜찮으세요?” “응. 잘 끝났어. 내일 얘기하자.”

잘 끝난 게 아니다. 그냥 끝났다. 선 안 넘었다. 나도, 상대방도. 근데 이게 ‘잘’ 끝난 거다. 여자 영업에겐.

남자 영업들은 술 많이 마시고. 택시비 많이 나오고. 다음 날 숙취가 심한 게 고민이래.

내 고민은 다르다. 선 지키면서 관계 유지하기. 프로젝트 따내면서 존중받기. ‘프로페셔널’로 기억되기.

집 도착했다. 샤워했다. 긴장 풀린다. 어깨 내린다. 오늘도 지켜냈다. 선을.

다음 날 아침

출근했다. 팀장님이 물어본다. “어제 CISO님이랑 미팅 어땠어?” “좋았습니다. 긍정적이셨어요.”

“뭐 특별한 얘기 있었어?” “BMT 잘하면 우리 쪽으로 기울 것 같다 하셨어요.” 비즈니스 성과만 보고한다.

어제 있었던 것들. 말 안 한다. 말해봤자 “원래 그래” 소리 듣는다. “술자리가 그렇지 뭐” 라고 한다. “차장님이 잘 넘겼겠지” 라고 한다.

남자 선배가 “여자 영업이 유리하지. 고객이 잘 봐주잖아.” 유리하다. 정말?

관계 만들기는 쉬울지 몰라. 근데 그 관계 유지하는 게 더 어렵다. 매번 선 지켜야 한다. 미소 유지하면서. ‘프로페셔널’과 ‘친근함’ 사이. 줄타기다. 매번.

SE가 커피 갖다 준다. “차장님 고생하셨어요. 제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괜찮아. 이런 거 익숙해.”

익숙하다고 말했다. 근데 익숙해지면 안 되는 건데. 10년 했는데도 매번 긴장한다. 매번 계산한다. 매번 조심한다.

프로젝트 따내고

2주 뒤. BMT 끝났다. 우리가 선정됐다. 30억. 팀 회식했다. 다들 축하해줬다.

“역시 차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소주 돌린다. 기분 좋다.

근데 구석에서 들린다. “차장님이 관리 잘하셨나 봐.” “여자 영업이라 CISO님이 잘 봐주신 거 아냐?”

10년 했다. 레퍼런스 20개 넘는다. 제안서 스토리라인은 팀에서 최고다. BMT 발표도 내가 다 했다.

근데 ‘여자라서’ 땄다고 한다. ‘관리 잘했다’고 한다. 관리가 뭔데. 정확히.

화장실 갔다. 거울 봤다. “너 잘했어. 실력으로 딴 거야.” 스스로 말해준다. 아무도 안 해주니까.

또 다른 저녁 약속

다음 달. 또 프로젝트 있다. 다른 회사. 다른 임원. “차장님, 저녁 한번 하시죠.”

또 간다. 또 계산한다. 무슨 옷, 어떤 거리, 어느 선까지. 10년 했는데도. 20년 해도. 이건 안 익숙해진다.

남자 후배가 물었다. “선배님, 영업 힘들어요?” “응. 힘들어.”

“어떤 게 제일 힘들어요?” 대답 못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매출 압박? 그건 다 똑같다. 경쟁 PT? 그것도 다 한다. 야근? 그것도 마찬가지.

근데 내가 하는 건 거기에 더해. 선 지키기. 거리 조절하기. ‘프로페셔널’하게 보이기. ‘여자’가 아니라 ‘영업’으로 기억되기.

이게 제일 힘들다. 근데 이건 말해도 이해 못 한다. 안 겪어본 사람은.


10년 했다. 차장 달았다. 실력 쌓았다. 근데 아직도 매번 계산한다. 언제쯤 그냥 ‘영업’으로만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