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서 마감 24시간 전, 최고의 스토리라인은 만들어진다
- 05 Dec, 2025
제안서 마감 24시간 전, 최고의 스토리라인은 만들어진다
D-1, 오후 4시
내일 오전 10시 제안 발표다. 자료는 있다. PPT 120장. 근데 이게 제안서가 아니라 자료 더미인 거다.
SE가 보낸 기술 스펙 40장. 컨설턴트가 작성한 현황 분석 30장. 마케팅팀이 준 레퍼런스 20장. 나머지는 회사 소개랑 가격표.
고객은 CISO. 임원 보고용 자료 원한다고 했다. “핵심만 20장으로” 그랬다.
120장을 20장으로. 이게 편집이 아니다. 재창조다.
커피 마셨다. 네 번째다.

스토리라인이 없으면 그냥 카탈로그다
10년 하면서 배운 거. 제안서는 제품 설명서가 아니다. 설득의 도구다.
고객이 보는 건 기능이 아니다. 솔루션이다. 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냐는 거다.
DLP 제안서 100개 봤다. 다 똑같다. “개인정보 유출 방지”, “7가지 차단 기술”, “클라우드 연동”.
근데 통하는 제안서는 다르다. 고객 이야기로 시작한다.
“귀사는 지난 6개월간 3번의 개인정보 유출 위험 상황이 있었습니다. 협력업체 USB, 재택근무 PC, 퇴사자 이메일.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지만, 다음엔 모릅니다.”
첫 장부터 심장 찌른다. “이거 우리 얘기잖아” 이렇게 만드는 거다.
그 다음이 문제 정의.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기술 문제가 아니다. 프로세스 문제다. 가시성 문제다.
그리고 우리 솔루션. “이렇게 하면 됩니다.”
마지막이 ROI. “이 정도 투자로 이만큼 리스크 줄입니다.”
이게 스토리라인이다. 기승전결. 문제-원인-해결-효과.
근데 이걸 마감 24시간 전에 만든다. 왜? 그때까지 자료가 안 모여서.
Pain Point 찾기: 고객사 3번 방문의 의미
제안서 쓰기 전에 한 것들. 고객사 3번 갔다.
첫 번째: 담당자 미팅. 보안팀 과장. RFP 받으러 간 거지만 질문 30분 했다.
“요즘 제일 골치 아픈 게 뭐예요?” “임원들이 자꾸 개인 클라우드 쓰는 거요. 파일 막 올리고.” “막을 수는 없나요?” “막으면 일을 못 한다고 난리예요. 대안 달래요.”
메모했다. 임원 - 클라우드 - 업무 연속성.
두 번째: CISO 미팅. 의사결정자. 30분 약속인데 15분 걸렸다.
“우리 회사 DLP 도입 이유 아시죠?” “규제 대응이요.” “맞아요. 근데 그것만으론 예산 안 나와요. 이사회 설득할 숫자 필요해요.”
메모했다. 이사회 - 정량적 효과 - 비용 대비.
세 번째: 현장 실사. 보안팀이랑 IT팀이랑 같이. 실제 업무 환경 봤다.
개발팀은 GitHub 쓴다. 영업팀은 파일 공유에 네이버 클라우드 쓴다. 임원 비서실은 USB 쓴다.
“통제가 안 되는 거네요.” “안 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죠. 방법이 없어서.”
메모했다. 부서별 - 다른 환경 - 통합 필요.
이 메모들이 Pain Point다. 제안서 첫 5장이다.

산발적 자료를 하나의 흐름으로
오후 7시. 본격 작업 시작.
SE한테 받은 기술 스펙 40장. 이거 그대로 못 쓴다. 기술자 언어다.
“멀티 채널 모니터링 엔진”, “정책 기반 필터링”, “머신러닝 패턴 분석”.
이해는 한다. 근데 CISO는 이거 안 궁금하다. “그래서 뭐가 좋은데?” 이거 궁금한 거다.
번역 작업. 기술을 비즈니스 언어로.
“멀티 채널 모니터링 엔진” → “USB, 이메일, 메신저, 클라우드 모두 하나의 화면에서 관리” “정책 기반 필터링” → “부서별로 다른 규칙 적용 가능. 개발팀은 GitHub 허용, 영업팀은 제한” “머신러닝 패턴 분석” → “신규 유출 경로 자동 탐지. 관리자 설정 불필요”
40장이 10장 됐다.
컨설턴트 자료 30장. 현황 분석. AS-IS 다이어그램 15장, TO-BE 다이어그램 15장.
다이어그램 좋다. 근데 너무 많다. 눈 아프다.
핵심만 뽑았다. AS-IS 3장, TO-BE 3장. 나머지는 부록.
비교 표 하나 만들었다.
| 현재 | 도입 후 |
|---|---|
| 8개 시스템 개별 관리 | 1개 통합 콘솔 |
| 사고 후 사후 대응 | 사전 차단 |
| 월 40시간 수작업 점검 | 자동화 |
숫자 넣으니까 확실히 달라 보인다.
마케팅 자료 20장. 레퍼런스. “A사 도입 사례”, “B사 도입 사례”.
다 비슷하다. “성공적으로 구축”, “만족도 높음”.
이것도 번역. 고객 입장에서.
“제조업 C사: 협력업체 300개 관리. USB 통제로 도면 유출 제로화” “금융 D사: 재택근무 500명. VDI 연동으로 집 PC도 회사 수준 보안”
구체적 숫자. 구체적 상황. 이게 레퍼런스다.
20장이 4장 됐다.
120장에서 50장. 아직 반이다.

설득의 흐름: 왜-무엇-어떻게-얼마
오후 10시. 구조 잡는다.
제안서는 4막 구조다.
1막: 왜 (Why)
- 고객 Pain Point
- 현재 리스크
- 규제 이슈
- 목표: 공감 형성
5장.
첫 장: “귀사의 보안 현황”
- 8개 시스템 사일로
- 가시성 부족
- 사후 대응
둘째 장: “3가지 위험 시나리오”
- 시나리오 1: 협력업체 USB
- 시나리오 2: 임원 개인 클라우드
- 시나리오 3: 퇴사자 이메일 (실제 그 회사에서 있었던 일)
셋째 장: “규제 환경 변화”
- 개인정보보호법 개정
- 과징금 최대 3%
- 인증 심사 강화
넷째 장: “보안팀의 현실”
- 월 40시간 수작업
- 사고 때마다 보고서
- 인력 부족
다섯째 장: “해결해야 할 과제”
- 통합 관리
- 사전 차단
- 업무 연속성
- 비용 효율
고객이 고개 끄덕이게 만드는 거다. “맞아, 우리 문제가 이거야.”
2막: 무엇 (What)
- 우리 솔루션
- 핵심 기능
- 차별점
- 목표: 이해와 신뢰
10장.
“OO DLP 개요”
- 올인원 플랫폼
- 3가지 핵심 모듈
“기능 1: 통합 모니터링”
- 7개 채널 실시간
- 단일 콘솔
- 스크린샷 (실제 화면)
“기능 2: 지능형 차단”
- 정책 엔진
- 부서별 설정
- 예외 처리
“기능 3: 자동 대응”
- 실시간 알림
- 워크플로우
- 증적 관리
각 기능마다 Before/After 비교. 시각적으로.
“경쟁 제품 대비 강점”
- 표로 정리
- 3개 경쟁사
- 5가지 기준 (가격은 빼고. 기술로 승부)
“국산 솔루션의 장점”
- 기술 지원 속도
- 커스터마이징
- 한글 처리
마지막: “레퍼런스”
- 동종 업계 2곳
- 구체적 수치
객관적 근거. 신뢰 쌓는 거다.
3막: 어떻게 (How)
- 도입 방안
- 구축 프로세스
- 리스크 관리
- 목표: 실행 가능성
6장.
“도입 로드맵”
- 3개월 타임라인
- 단계별 산출물
- 마일스톤
“1단계: 현황 분석 (2주)”
- 자산 조사
- 정책 수립
- 테스트 계획
“2단계: 파일럿 (4주)”
- 부서 1개
- 100명
- 검증
“3단계: 전사 확대 (6주)”
- 단계적 롤아웃
- 사용자 교육
- 안정화
“리스크 관리”
- 예상 이슈 3가지
- 대응 방안
- 롤백 계획
“추진 체계”
- 우리 팀 구성
- 고객 TF
- 협업 방식
실행 가능해 보이게. 구체적으로.
4막: 얼마 (How much)
- 비용
- ROI
- 기대 효과
- 목표: 의사결정
6장.
“투자 비용”
- 라이선스
- 구축
- 교육
- 1년 유지보수 (총액 하나, 세부 하나)
“TCO 분석”
- 3년 총소유비용
- 경쟁사 대비
- 숨은 비용 없음
“ROI 산출” 이게 핵심이다.
- 유출 사고 방지: 연 2억 (과징금 + 대응 비용)
- 관리 시간 절감: 연 6000만원 (월 40시간 → 10시간)
- 인증 비용 절감: 연 3000만원 (통합 관리로)
- 합계: 연 2.9억
투자: 1.8억 회수 기간: 8개월
숫자는 보수적으로. 근거는 구체적으로.
“기대 효과”
- 정량적: 위의 ROI
- 정성적: 보안 수준 향상, 컴플라이언스, 업무 효율
마지막 장: “제안 조건”
- 가격
- 계약 조건
- 특별 제공 (교육 추가 무료 등)
새벽 2시, 스토리 점검
4막 구조 완성. 이제 27장.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고객 입장에서.
1장: Pain Point 공감 → OK 5장: 문제 정의 명확 → OK 10장: 우리 솔루션 이해 → OK 15장: 차별점 납득 → OK 20장: 실행 가능성 → OK 27장: 투자 결정 → OK
흐름 자연스럽다. 논리 빈틈없다.
근데 뭔가 부족하다. 감정이 없다.
제안서는 논리만으론 안 된다. 공감이 필요하다.
다시 손본다.
첫 장에 사진 넣었다. 보안팀 야근 사진. (웹에서 찾은 거) “이게 귀사 보안팀의 현실입니다.”
레퍼런스에 인터뷰 넣었다. C사 보안팀장 말. “도입 전엔 매일 불안했습니다. 도입 후엔 잠이 옵니다.”
ROI 페이지에 그래프. 막대 그래프로 비용 대비 효과. 시각적으로 확 들어온다.
마지막 장. “함께 만들겠습니다” “이 제안서는 제품 판매가 아닙니다. 파트너십 제안입니다.”
좀 오글거린다. 근데 먹힌다. 진심 담으면.
새벽 4시, 디테일 전쟁
큰 틀 완성. 이제 디테일.
오타 잡는다. 맞춤법 검사 3번.
고객사 이름 20번 나온다. 한 번이라도 틀리면 끝이다. 전부 확인.
페이지 번호 맞춘다. 목차랑 일치하는지.
그래프 색깔 통일. 파랑-빨강-회색 일관성.
폰트 크기. 제목 28pt, 소제목 20pt, 본문 16pt. 전부 체크.
이미지 해상도. 흐린 거 다시 만든다.
각주 다 붙인다. “출처: 한국인터넷진흥원, 2024”
페이지 레이아웃. 여백 적당한지. 숨 쉬는 느낌.
하이퍼링크. 작동하는지 하나씩 클릭.
PDF 변환. 파일명 “OO사_DLP_제안서_최종_240315.pdf”
용량 확인. 50MB 넘으면 메일 안 간다. 압축.
백업 3곳. 노트북, USB, 클라우드.
새벽 5시. 완성.
27장. 60MB. 완벽하다.
발표 전 1시간, 최종 리허설
아침 9시. 회의실 도착.
빔 프로젝터 연결. 노트북이랑 안 맞는다. 어댑터 바꿨다. 됐다.
리모컨 작동 확인. 배터리 새 거로.
화면 밝기 조절. 형광등 켜면 안 보인다. 조명 껐다.
제안서 출력본 5부. 나눠 드릴 거.
명함 10장. 주머니에.
커피 마셨다. 여덟 번째다. 손 떨린다. 안 마실 걸.
혼자 리허설. 27장 15분 안에.
1분에 2장. 빠르다. 근데 가능하다. 흐름 외웠다.
첫 장: “오늘 제안드릴 내용은 귀사의 3가지 보안 과제 해결 방안입니다.”
10장: “OO DLP는 8개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합니다.”
20장: “투자 대비 효과, 8개월 만에 회수 가능합니다.”
27장: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마무리: “질문 받겠습니다.”
연습 3번. 13분 28초. 적당하다.
오전 10시, 발표
CISO 들어왔다. 임원 2명 더. 보안팀장, 담당 과장.
5명. 예상대로.
“시작하겠습니다.”
첫 장 넘겼다. CISO 표정 읽는다. 집중한다.
5장. Pain Point. 고개 끄덕인다. 통했다.
10장. 솔루션 설명. 임원이 손 들었다. “다른 부서도 같은 정책 쓰나요?” “아닙니다. 부서별 커스터마이징 가능합니다.” “좋네요.”
15장. 레퍼런스. CISO가 물었다. “C사랑 우리랑 규모 비슷한가요?” “직원 수 거의 같습니다. 자산 규모는 귀사가 20% 더 큽니다.” “그럼 기간은?” “비슷할 겁니다. 3개월 잡았습니다.”
20장. ROI. 다들 집중한다. 숫자 나오니까.
보안팀장이 물었다. “관리 시간 40시간에서 10시간, 이거 확실한가요?” “C사 실측 데이터입니다. 자동화 범위에 따라 달라질 순 있습니다.” “레퍼런스 연락처 줄 수 있나요?” “네, 제안서 부록에 있습니다.”
27장. 마무리.
“질문 있으십니까?”
CISO가 말했다. “인상적이네요. 우리 상황 많이 파악하셨어요.”
통했다. 3번 방문한 게 보였다.
“다음 주 화요일까지 검토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끝.
회의실 나왔다. 다리 풀렸다.
결과: 2주 후
전화 왔다.
“수주 축하드립니다.”
그 순간. 24시간의 가치.
산발적이던 자료들. 하나의 스토리가 됐다.
기술은 기술대로. 숫자는 숫자대로. 근데 그걸 엮은 건 ‘흐름’이었다.
Pain Point에서 시작해서 ROI로 끝나는 여정.
고객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신뢰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구조.
이게 제안서다.
제안서는 정보 전달이 아니다. 설득의 도구다.
마감 24시간 전. 그때 최고의 스토리라인이 나온다.
왜?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으니까.
집중력이 최고조니까.
본질만 남으니까.
10년 했다. 아직도 마감 24시간 전엔 떨린다.
근데 그 떨림이 좋다. 살아있다는 느낌.
오늘도 RFP 왔다. 마감 2주.
실제론 13일 후 밤 10시에 시작할 거다.
그게 내 방식이다.
결국 통하는 건 ‘그들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제안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