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사항이 바뀌었는데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 04 Dec, 2025
금요일 오전 10시 37분
메일이 떴다. 제목부터 불길했다. “제안서 관련 추가 요구사항 전달드립니다 - 급함”
월요일 발표다. 오늘 금요일. 주말 끼고 3일.
손이 떨렸다. 마우스 클릭했다.
읽었다. 다시 읽었다. 믿기지 않아서 세 번 읽었다.
“기존 DLP 솔루션에 더해, 클라우드 환경 데이터 보호 방안도 제안서에 포함 부탁드립니다. SaaS 연동 사례와 AWS/Azure 환경에서의 구현 방법론, 그리고 클라우드 보안 컴플라이언스 대응 방안까지요. 참고로 경쟁사 A사에서는 이미 이 부분을 제안서에 넣었다고 들었습니다.”
경쟁사 애기까지 나왔다.
전화했다. 고객사 보안팀장님. “팀장님, 이거 지금 추가하시면…” “영업팀에서 요청한 거예요. 임원진이 클라우드 전환 고려 중이라서요.” “처음 RFP에는 없었는데요.” “알아요. 근데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위에서 시킨 거라.”
끊었다. 책상에 머리 박았다.
3일. 클라우드 아키텍처 새로 그려야 하고. 레퍼런스 찾아야 하고. BMT 시나리오 수정해야 하고. 발표 자료 다시 짜야 한다.
6주 준비한 제안서가 휴지 조각.

긴급 회의 소집
슬랙에 메시지 날렸다. “@제안팀 @SE팀 @컨설턴트 긴급회의 11시 3층 회의실”
30분. 준비할 시간도 없다.
회의실 들어갔다. 다들 표정이 어둡다. 메일 본 거다.
“일단 들어주세요.” 상황 설명했다. 5분.
제안팀 과장이 먼저 말했다. “이거 월요일까지 불가능한데요?” “저도 압니다.” “아니, 클라우드 파트만 50페이지는 나와야 하는데. 우리 레퍼런스도 약하고.”
SE팀 대리가 고개 저었다. “기술 검증도 안 됐어요. AWS 연동 테스트는 2주 걸리는데.” “알아요. 다 알아요.”
컨설턴트가 한숨 쉬었다. “방법론부터 새로 써야 해요. 클라우드 보안 프레임워크 전부 뒤집어야 한다고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경쟁사는 이미 넣었대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A사 제안서에 클라우드 파트 들어갔어요. 100페이지 넘는다고 들었어요. 우리가 안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도 대답 안 했다. 다들 안다. 탈락이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리스트업 합시다.” 화이트보드에 적기 시작했다.
기존 레퍼런스 중 클라우드 연관된 것. 파트너사 사례 가져올 수 있는 것. 오픈소스 아키텍처 참고할 것. 컴플라이언스 매핑 기존 자료 재활용.
2시간 회의했다. 결론: 주말 반납.

개발팀 설득
오후 2시. 개발팀장 만나러 갔다.
필요했다. 기술 검증 확인. “클라우드 API 연동, 지금 어디까지 돼요?” “안 돼요. 개발 일정에 없었어요.”
예상한 대답.
“데모라도 만들 수 있어요?” “데모요? 지금요?” “월요일까지요.” “미쳤어요?”
미친 거 맞다.
“고객사가 요구했어요. 안 넣으면 우리 탈락이에요.” “그건 영업 문제잖아요.” “개발팀장님. 이거 수주하면 개발 리소스 확보되는 거 아시죠? 클라우드 파트만 5억이에요.”
5억. 숫자를 말했다.
개발팀장 표정이 바뀌었다. “일정은요?” “내년 상반기 개발 시작. 6개월 텀 드릴게요.” “리소스는요?” “추가 인력 2명 요청할게요. 본부장님께.”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목업만 만들면 돼요?” “네. 화면 구성이랑 플로우만 보여주면 돼요. 실제 연동은 나중에.” “주말에 개발자 불러야 하는데요.” “주말 특근비 처리할게요. 제 인센티브에서.”
내 돈 나간다. 그래도 수주하면 받는다.
“알겠어요. 대신 수주 확정되면 인력 꼭 받아내요.” “약속합니다.”
악수했다. 손에 땀이 났다.
개발팀 나왔다. 등에서 식은땀 흘렀다.
인센티브가 날아갈 수도 있다. 그래도 수주 못 하면 그것도 없다.

금요일 밤 9시
사무실에 남았다. 제안팀 3명, SE 2명, 나.
피자 시켰다. 먹으면서 일했다.
제안팀이 클라우드 아키텍처 그렸다. SE가 기술 스펙 정리했다. 나는 스토리라인 잡았다.
“기존 온프렘 환경 보호하면서, 클라우드 전환 대비한다. 이게 메시지예요.” “하이브리드 접근이네요.” “맞아요. 단계적 전환 시나리오로 가요. 1단계 온프렘, 2단계 하이브리드, 3단계 풀클라우드.”
페이지 구성 다시 짰다. 기존 80페이지에서 130페이지로.
밤 11시. 초안 나왔다.
“내일 10시 출근해서 다듬어요. 일요일 오후까지 마무리.” “월요일 리허설은요?” “월요일 오전. 발표 오후 2시니까 가능해요.”
다들 고개 끄덕였다. 표정이 죽어 있었다.
“수고했어요. 내일 봐요.” 불 껐다.
집 가는 택시 안. 휴대폰 봤다.
고객사 보안팀장님한테 메시지 왔다. “영업팀 상무님이 월요일 발표 참석하신대요. 클라우드 파트 꼭 신경 써주세요.”
상무가 온다. 압박이다.
답장 안 했다. 할 말이 없었다.
토요일
10시 출근. 다들 와 있었다.
화면 보면서 페이지 넘겼다. “여기 다이어그램 화살표 방향 이상해요.” “컴플라이언스 매핑 AWS 기준으로 다시 해요.” “레퍼런스 고객사명 공개 가능한지 확인했어요?”
점심 먹고. 다시 수정.
오후 3시. 개발팀에서 연락 왔다. “목업 나왔어요. 확인해보세요.”
달려갔다. 개발실.
화면 봤다. 클라우드 대시보드 목업. 데이터 흐름 시각화. SaaS 연동 인터페이스.
“이거면 돼요?” “충분해요. 이거 BMT 때 보여드릴 수 있죠?” “네. 시연용 환경 셋업할게요.”
고마웠다. “주말에 나와줘서 감사합니다.” “수주하면 회식 쏘세요.” “당연하죠.”
돌아왔다. 제안서에 기술 구현 방안 추가했다.
저녁 8시. 90% 완성.
“오늘 여기까지. 내일 마무리해요.” 퇴근했다.
집 와서 샤워했다. 침대 누웠다.
눈 감았는데 제안서가 보였다. 페이지 넘어가는 게 보였다. 상무님 표정이 상상됐다.
잠 안 왔다. 새벽 2시까지 천장 봤다.
일요일 오후
마지막 점검. 오타 확인. 페이지 번호 맞추기. 목차 업데이트.
오후 4시. 완성.
130페이지. 클라우드 파트 48페이지.
PDF 저장했다. 고객사에 메일 보냈다. “최종 제안서 제출합니다.”
답장 왔다. “확인했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사무실 나왔다. 해 지고 있었다.
편의점 들렀다. 맥주 샀다.
집 와서 마셨다. 한 캔.
생각했다. 이게 맞나.
요구사항이 바뀌는 건. 당연한 건가.
발표 3일 전에 던지는 게. 정상인가.
6주 준비한 게. 3일 만에 뒤집히는 게.
이게 영업인가.
맥주 한 캔 더 땄다.
월요일 오전
8시 출근. 발표 리허설.
회의실에서 프로젝터 켰다. 페이지 넘기면서 시나리오 점검.
“온프렘 환경 현황 분석, 3분.” “클라우드 전환 필요성, 2분.” “하이브리드 아키텍처 제안, 5분.” “기술 구현 방안, 4분.” “레퍼런스, 2분.” “투자 대비 효과, 3분.” “질의응답, 5분.”
총 24분. 30분 발표 시간에 맞다.
SE가 기술 파트 리허설했다. 매끄러웠다.
컨설턴트가 방법론 설명 연습했다. 괜찮았다.
내 파트 연습했다. 목소리 떨렸다.
다시 했다. 나아졌다.
11시. 준비 끝.
“점심 먹고 출발해요. 1시 고객사 도착.” 다들 고개 끄덕였다.
밥 먹었다. 목으로 안 넘어갔다.
발표장
오후 2시. 고객사 본관 대회의실.
평가위원 7명 앉아 있었다. 보안팀장, 인프라팀장, IT전략팀장, 구매팀, 법무팀.
그리고 상무. 50대 중반. 날카로운 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자리 앉았다. 노트북 연결했다.
보안팀장이 말했다. “30분 드리겠습니다. 시작하세요.”
심호흡했다. 시작했다.
첫 페이지. 회사 소개.
두 번째. 고객사 현황 분석.
세 번째. Pain Point 정의.
넘어갔다. 클라우드 파트.
상무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집중하는 거다.
SE가 아키텍처 설명했다. 다이어그램 보여줬다.
“AWS와 Azure 모두 지원합니다. 멀티 클라우드 환경에서도 통합 관리 가능합니다.”
상무가 손 들었다. “잠깐. 여기 API 연동 부분, 실제 구현 가능한 겁니까?”
순간 조용해졌다.
SE가 답했다. “네. 저희가 목업 준비했습니다. 보여드릴까요?”
“보죠.”
개발팀이 만든 데모 실행했다. 화면에 대시보드 떴다. 데이터 흐름 시각화됐다.
상무가 봤다. 10초. 20초.
“괜찮네요.”
숨 쉬었다.
발표 계속했다. 레퍼런스 보여줬다. 비용 분석 설명했다.
28분. 끝났다.
“이상입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상무가 물었다. “클라우드 파트 일정은요?” “6개월 예상합니다. 단계적 구축으로 리스크 최소화하겠습니다.”
IT전략팀장이 물었다. “경쟁사 대비 강점은요?” “온프렘 환경 레퍼런스가 저희가 강합니다. 클라우드 전환 시 기존 정책 마이그레이션이 핵심인데, 이 부분 경험이 있습니다.”
구매팀이 물었다. “가격은요?” “제안서 마지막 장에 있습니다. 3년 TCO 기준으로 산정했습니다.”
5분 질의응답.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결과는 이번 주 안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나왔다. 엘리베이터 탔다.
1층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말 안 했다.
밖으로 나왔다. 숨 쉬었다.
수요일 오후
전화 왔다. 고객사 보안팀장.
“최종 선정됐어요.”
”…네?”
“축하합니다. 상무님이 클라우드 파트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금요일에 계약 미팅 잡을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끊었다.
손 떨렸다. 책상 잡았다.
슬랙에 메시지 날렸다. “수주 확정. 금요일 회식.”
답장 쏟아졌다. “축하해요!” “드디어!” “고생했어요!”
의자에 앉았다. 모니터 봤다.
3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요구사항 바뀌었을 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포기하고 싶었을 때.
그래도 했다.
이게 영업이다. 바뀌는 거 당연하다. 불가능한 거 해내는 거다.
그래도. 다음엔 좀 여유 있게 바꿔줬으면.
금요일 회식 때 개발팀장이 물었다. “다음 프로젝트는 언제예요?”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다음 주부터요. 새 RFP 떨어졌어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또 바뀌겠지, 요구사항. 그래도 하겠지, 어떻게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