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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BMT에서 졌을 때, 나는 왜 그날 밤을 혼자 보낼까

BMT에서 졌을 때, 나는 왜 그날 밤을 혼자 보낼까

BMT에서 졌을 때, 나는 왜 그날 밤을 혼자 보낼까 오후 4시 32분, 통화 고객사 CISO한테 전화 왔다. "차장님, 결과 나왔는데요..." 목소리 톤으로 알았다. 졌다. 3개월. 12주. 90일. RFP 분석하고, 제안서 42페이지 쓰고, PT 리허설 7번 하고. BMT 준비하느라 개발팀 SE들 새벽까지 붙잡고. 그게 다 4시 32분에 끝났다. "경쟁사가 가격 쪽에서..." 말을 끝까지 안 들었다. 들어도 소용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피드백 받을 수 있을까요?" 목소리는 안 떨렸다. 10년차니까. 전화 끊고 5분간 멍했다. 창밖 보다가, 노트북 보다가, 천장 보다가. 팀한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팀에게 말하기 컨퍼런스룸 예약했다. "10분 후 회의실로." SE 3명, 컨설턴트 2명, 제안팀 1명. 3개월 같이 뛴 사람들. "떨어졌습니다." 첫 마디가 제일 어렵다. 다들 표정이 굳었다. SE 박 과장은 한숨 쉬고. 컨설턴트 김 대리는 고개 숙이고. 제안팀 이 사원은... 울 것 같았다. 첫 프로젝트니까. "미안합니다. 제가 PT에서..." 말을 시작하려는데 박 과장이 끊었다. "아니에요. 우리 기술은 좋았어요." 기술은 좋았는데 졌다. 그게 더 슬프다. "다음 주에 피드백 미팅 잡겠습니다. 뭐가 부족했는지 들어보고." "네." "네..." "...네." 대답이 맥이 없다. 당연하다. 나도 그렇다. 회의 끝나고 다들 자리로. 아무도 수다 안 떤다. 키보드 소리만 딱딱. 저녁 6시쯤 박 과장이 말했다. "차장님, 회식..." "아뇨. 오늘은 각자." "그럼 다음에..." "네. 수고했어요."왜 혼자인가 팀이랑 술 마시면 위로받는다. "우리 잘했어요." "다음엔 이길 거예요." 그런 말들. 근데 그게 싫다. 위로가 싫은 게 아니라, 위로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PM은 나다. 제안서 스토리라인 짠 것도 나. 고객 Pain Point 분석한 것도 나. PT에서 발표한 것도 나. 졌으면 내 책임이다. 팀한테 '괜찮아요' 들으면, 그게 더 무겁다. 그래서 혼자 있는다. 혼자 복기하고, 혼자 자책하고, 혼자 정리한다. 그게 내 방식이다. 10년 동안 BMT 떨어진 게 이번이 처음 아니다. 6번째다. 6번 다 혼자 보냈다. 처음엔 팀이랑 술 마셨었다. 다 같이 위로하고, '경쟁사 가격 덤핑이야' 하고. 근데 다음 날 아침, 결국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럼 차라리 바로 혼자 있는 게 낫다.퇴근길, 오피스텔 9시 넘어 나왔다. 역삼역까지 걸었다. 15분. 편의점 들러서 맥주 2캔. 집 도착. 9시 40분. 불 안 켰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면 충분하다. 침대에 앉아서 맥주 땄다. 첫 모금. 쓰다. 근데 계속 마신다. 노트북 켰다. 제안서 파일 열었다. "XX사_DLP제안서_최종_v8.pptx" v8이다. 8번 수정했다는 뜻. 42페이지 넘겼다.제안 배경 고객 Pain Point 분석 솔루션 아키텍처 차별화 포인트 레퍼런스 가격 (여기서 졌다)가격. 우리 견적 1억 2천. 경쟁사는... 아마 9천? 8천? 3천만원 차이. 고객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다. '기술 비슷한데 3천 싸면 그거 쓰지.' 근데 비슷하지 않다. 우리 DLP가 훨씬 낫다. 오탐률도 낮고, 정책 커스터마이징도 쉽고. BMT 점수도 우리가 높았을 거다. 그래도 졌다. 결국 돈이다. 맥주 두 번째. 자책의 단계 1단계: 내 탓 "PT를 더 잘할 걸." "고객 니즈를 제대로 못 파악했나?" "가격 협상을 더 강하게 밀 걸." 2단계: 팀 탓 (잠깐) "SE가 BMT에서 대응을 더 빠르게..." "제안팀이 스토리를..." 아니다. 팀 탓 아니다. 다들 최선 다했다. 3단계: 회사 탓 "본사에서 가격 권한을 더 줬으면." "마케팅 예산이 있었으면." "경쟁사는 대기업 자회사라 덤핑 가능하잖아." 이것도 핑계다. 4단계: 현실 인정 "졌다." "가격에서 졌다." "다음엔 다르게 해야 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 보통 2시간. 지금 11시 40분. 예정대로다. 복기, 그리고 피드백 전략 맥주 다 마셨다. 이제 일한다. 노트 새로 열었다. "BMT 탈락 복기_XX사.docx" 왜 졌는가가격: 3천만원 차이 (추정) 고객사 예산 축소 가능성 경쟁사 레퍼런스: 동종 업계 3곳 (우리는 1곳) PT 시 CTO 반응 미온적 (기억남)다음엔 뭘 다르게초기 단계에서 예산 확인 더 강하게 가격 경쟁력 확보 방안 (임원 협의 필요) 레퍼런스 부족 업종은 제안 보류 검토 PT 전에 키맨 사전 미팅 (CTO 공략 실패)피드백 미팅 준비목적: 정확한 탈락 이유, 점수 차이, 개선점질문 리스트:BMT 점수 공유 가능한가? 기술 부족 부분이 있었나? 가격 외 다른 요인은? 차기 프로젝트 일정? 우리 솔루션 검토 여지는?태도: 감정 배제, 프로페셔널, 관계 유지목표: 다음 기회 만들기타이핑하다 보니 머리가 정리됐다. 감정은 가라앉고, 전략이 보인다. 이게 혼자 있는 이유다. 슬픔 → 자책 → 분석 → 계획. 이 과정을 누구랑 같이 못 한다. 자정 넘었다. 내일 아침 9시 출근. 피드백 미팅 일정 잡아야 한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 보며 생각했다. "다음엔 이긴다." 항상 이렇게 끝난다. 6번 다. 여자 영업의 BMT 탈락 남자 선배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는지 안다. 술 마신다. 같이. 많이. "씨발, 경쟁사 XX..." "에이 씨, 다음엔..." 나도 처음엔 그렇게 했다. 근데 여자 혼자 끼면 분위기가 애매하다. 선배들이 조심하고, 나도 조심하고. 그냥 '수고했어요' 하고 빠지는 게 편하다. 여자 영업이라서 불리한 건 아니다. 오히려 고객사 남자 담당자들이 잘 봐줄 때도 있다. "차장님이 열심히 하시니까..." 근데 이럴 때, 떨어졌을 때. 위로 방식이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남자 영업들끼리는 "야 괜찮아, 원래 그래" 하고 끝. 나한테는 "차장님 탓 아니에요, 정말" 이렇게 조심스럽게. 그래서 더 혼자 있는다. 조심받는 것도 부담이다. 10년차면 이제 괜찮아야 하는데. 아직도 가끔 '여자 영업'이라는 게 껴든다. BMT 떨어진 날 밤은 특히. 다음 날 아침 알람. 7시. 일어났다. 눈 퉁퉁. 씻고, 커피 타고, 옷 입고. 거울 봤다. "오늘도 일한다." 출근길 지하철. 어제 떨어진 프로젝트 생각 안 난다는 거짓말. 계속 생각난다. 근데 할 일이 있다.피드백 미팅 일정 잡기 다음 RFP 검토 신규 고객사 방문회사 도착. 8시 50분. 팀원들 출근 전. 자리 앉아서 메일 열었다. 고객사 CISO한테 메일 썼다. "어제 통화 감사드립니다. 피드백 미팅 가능하실까요? 개선점 듣고 싶습니다." 보냈다. 박 과장 출근했다. "차장님, 어제..." "피드백 미팅 잡을게요. 기술적으로 뭐 부족했는지 들어봐야죠." "네." 일상으로 돌아왔다. 슬픔은 계속 있는데, 일은 계속된다. 점심 때 답장 왔다. "다음 주 화요일 2시 어떠세요?" "감사합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 그때까지 질문 리스트 정리하고. 마음 정리하고. 프로답게 들어간다. 떨어졌지만, 관계는 이어간다. 고객사는 계속 있고, 프로젝트는 계속 나온다. 다음 기회를 위해. 그게 10년차의 방식이다. 밤의 의미 BMT 떨어진 날 밤. 항상 혼자 보낸다. 팀한테 미안해서가 아니라,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감정 소화하고, 실패 분석하고, 다음 전략 세우고. 이 과정은 혼자 해야 한다. 누가 위로해줘도, 결국 다음 제안서는 내가 쓴다. 다음 PT도 내가 한다. 그래서 혼자 있는다. 그게 프로다. 36세. 10년차. 아직도 떨어지면 슬프다. 근데 슬픔 뒤에 할 일이 보인다. 그게 성장인 것 같다.다음 BMT는 이긴다.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